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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동조합의 역사에서 전 세계의 협동조합 운동의 지형을 바꾼 대표적인 사건이 두 번 있었다. 하나는 영국의 공업 도시 맨체스터의 외곽에서 설립된 ‘로치데일의 공정개척자회( Rochdale Society of Equitable Pioneers)’라는 이름의 소비자협동조합이고, 다른 하나는 1960년대 후반, 혹은 70년대 초반이라고 추정되는 이탈리아의 사회적협동조합이다. 이 두 유형의 협동조합의 탄생은 수많은 협동조합의 목록에서 단지 한 자리를 차지할 그런 위상을 뛰어넘는다. 공정개척자회의 존재는 협동조합으로 어떻게 경제를 민주화할 수 있을지 꿈을 꾸게 해주었으며, 사회적협동조합은 협동조합이 어떻게 지역사회를 품으며 다양한 이해당사자들과 협동을 하는지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 장에서는 특히 공정개척자회의 사례를 통해 똘똘한 하나의 협동조합이 어떻게 협동조합 운동의 지형을 바꿀 수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협동조합에 관한 교육을 받았거나 운영하는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은 공정개척자회가 최초의 협동조합이라고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이미 살펴보았듯 공정개척자회에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는 까닭은 탄생의 시점이 아니다. 그리고 공정개척자회 이전에도 영국에서 이미 소비자협동조합이 존재했었다. 그보다는 최초의 근대적인 협동조합 혹은 ‘협동조합다운 운영원리’를 최초로 정립하여 성공적으로 운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의 운영원리는 국제협동조합 운동 조직인 ICA 차원에서 오랫동안 논의되어 지금의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협동조합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기여했다. 어떻게 이들의 탄생은 역사가 되었을까?
로치데일로 가는 길목에는 협동조합의 발생지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사진출처 : getty images)
공정개척자회를 만든 사람들은 공업 도시 맨체스터의 방직 공장의 노동자들이었다. 영국은 1763년 산업혁명이 일어난 나라이고, 유럽의 다른 나라들에 비해 일찍 공업이 발달했다. 특히 공정개척자들이 일했던 섬유산업 부문은 한창 호황을 누리고 있었고, 플란넬 판매가 증가하여 그것을 제작하던 작업장들이 번성하던 시기였다. 그런데 왜 그들은 그 바쁜 와중에 상점을 차리려고 했을까? 경기가 좋으면 돈도 많이 벌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렇지가 않았다. 오히려 늘어나는 시장의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노동시간은 길어졌지만, 고용주들은 임금을 늘려주지 않았다. 임금인상을 위해 파업이라도 할라치면 온갖 방해 공작이 들어와 좌절되고 앞섰던 주동자는 고용주들에게 찍혀 다시 일자리를 구하기 어렵게 된다. 노동법도 없고, 사회보장제도도 없었던 19세기에 노동자들과 그의 가족들을 보호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니 더 이상 졸라매다가는 허리가 부러질 것 같은 쥐꼬리만 한 급여에 의존할 수만은 없는 일이다.
우리가 일자리가 필요한 건 먹고살기 위해서다. 특히 가난한 사람들의 생계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식료품이다. 그래서 방직공이었던 공정개척자들은 자신의 생계를 책임질 다른 방도를 찾아야 했기에 결사체를 조직하여 협동조합 상점을 열기로 결정한 것이다.
1844년 영국 로치데일에서 문을 연 최초의 소비조합 상점 (사진출처 : Permanent Culture Now)
그런데 그들은 왜 노동자협동조합(이하 노협)이 아니라 소비자협동조합 형태의 상점을 낸 것일까? 장시간 노동의 고통스러운 작업장을 떠나 노동자협동조합을 만들어서 스스로 고용하는 방법을 선택하는 것이 당연한 수순인 듯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노협은 아직 그들의 선택지가 되지 못했다. 왜냐하면 첫째, 노동자협동조합 운동은 소비자협동조합 운동보다는 조금 늦게, 1830년대부터 프랑스에서 시작되었기에 당시는 아직 제대로 된 모델이 없었고 잘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둘째, 방직공 등인 로치데일의 개척자들은 자기 완결적인 기술을 가지고 완제품을 만들어 판매할 수 있는 전문 기능을 보유한 장인들이 아니었기에 노협은 선택지가 아니었을 것이라는 합리적인 의심을 할 수 있겠다. 각 나라별로 각각 다른 형태의 협동조합이 발전하는 데는 그 나라의 자연조건 및 산업의 형태도 영향을 미친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영국은 가까운 프랑스나 이탈리아, 스페인과 같이 장인들이 많은 나라가 아니어서 노협이 상대적으로 덜 발달한 까닭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공정개척자들이 소비자협동조합이라는 대안을 찾은 것은 영국 협동조합 운동의 특성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우선, 영국 협동조합의 역사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로버트 오언(Robert Owen)의 존재다. 공정한 사회를 추구했던 오언은 소비협동조합 모델의 창설자이며, 협동조합의 기본이 되는 원칙을 세웠다.
소비협동조합 모델의 창시자인 로버트 오언(Robert Owen, 1771~1858)
그를 따르던 많은 이들이 소비자협동조합을 만들었는데 특히 그의 제자였던 윌리엄 킹(William King)은 1828년에 브라이튼에서 최초의 협동조합다운 상점(Union Shops)을 설립하기도 했다. 그런데 당시 영국의 많은 협동조합들은 오언의 사상을 전파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러다 보니 외상 판매, 배당금 분배 등 무원칙한 경영으로 난립하던 실정이었다. 공정개척자회의 등장은 이런 산만한 협동조합 운동에 질서를 부여한 사건이었다. 협동조합다운 운영의 길을 찾았으니 그야말로 협동조합의 세상에서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의 출현인 것이다.
*이 칼럼은 추후 발행될 예정인 <이야기로 듣는 협동조합의 역사>(가제)에서 일부 발췌한 것입니다.
글 : 김신양
한국사회적경제연구회에서 회장을 맡아 먹거리, 서로돌봄, 생태적 에너지, 주민 참여를 통한 지역개발 등과 관련한 실천 활동을 지원하고, 정책을 만들기 위해 돈 안 되는 활동을 하고 있다. 3년간 ‘다른경제 학습동아리’를 운영했고, 최근에는 주로 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이나 생활협동조합 또는 지역의 소박한 모임의 학습을 지원하며 함께 배우고 익히고 성찰하는 일, 배우고 익힌 것을 책으로 쓰는 일, 현장에서 필요한 연구과제를 하는 일을 한다.
지은 책으로 《마을에서 함께 읽는 지역관리기업 이야기》 《깊은 협동을 위한 작은 안내서》 《한국 사회적경제의 역사》(공저) 《의료복지 2026 주치의가 답이다》(공저) 《프랑스의 실업자 운동》 등이 있다. 《지역관리기업, 사회관계를 엮다》 《다른 세상을 위한 7가지 대안》을 공동으로 번역했고, 《다른경제》를 편역했다.